보이지 않는 건축

보이지 않는 건축/ C3 건축과 환경 6월호 건축단상 2005

보이지 않는 건축
presence

pres ence [prezns] n. … 1 존재, 현존, 실재 (實在) … 2 출석, 임석, 참석(opp. absence); (군대 등의) 주둔 … Your ~ is requested. 참석하시기 바랍니다 … 3 a [the ~, one’s ~] 면전, 목전, 남이 있는 자리

absence

ab sence [abs∂ns] n. … 1 부재(不在); 불참, 결석, 결근(opp. presence) ((from)) … mark the ~ 출석을 부르다 … several ~s from school 수 차례의 결석 … 2 [또는 an ~];증거 등이 없음, 결핍(lack) ((of)) …

소리 없는 음악, 움직임 없는 춤

‘일전에 저는 가수 한영애가 어느 인터뷰에서 ’최근 노래가 조용해지고 얌전해지고 있다고들 한다’는 말에, 자신은 ‘무대에서 침묵으로 노래할 수 있었으면 하는 생각을 한다’ 고 말하는 것을 듣고 깜짝 놀란 적이 있었어요. 가수가 무대에서 침묵으로 노래한다는 것! 가수 입에서 나온 이 말을 듣고 대체 어떻게 놀라지 않을 수 있겠습니까? 동양에서라면 노래로 득음(得音)을 하겠다는 식의 생각을 하는 게 그리 어려운 일이 아니겠지만, 침묵으로 노래하리라는 말은 정말 생각지도 못했던 것이었습니다. ‘침묵으로 하는 노래’ 그것은 모든 음악적 형식을 벗어난 음악이고, 모든 음향적 성분을 벗어나서 울리는 음향을 느끼게 해줍니다. 삶이 된 노래, 아니 노래가 된 삶의 목소리, 바로 그것이 ‘침묵으로 하는 노래’라는 그 말로 표현된 것일 겁니다. 그것은 노래가 삶이었던 사람이 자신의 삶에 대해 말하는 방식이었던 것입니다.’ – 노마디즘2/ 이진경지음 중에서

필자가 여러 가지 공연 중에서도 즐겨 찾게 되는 것이 무용공연이다. 좋은 무용공연이 보여주는 무대공간, 그 위에서의 움직임, 음악, 그리고 다른 매체와의 통합시도 등을 보고 있노라면, 마치 어떤 종류의 운동이 몸의 쓰지 않는 근육을 움직이게 만들 듯, 머리 속 이곳 저곳을 자극 받고는 하기 때문이다.
그런 의미에서 몇 해전 서울국제현대무용제에 초대되었던 안무가 크리스 하링 (Chris Haring)과 멀티미디어 예술가 클라우스 오버마이어 (Klaus Obermaier)의 ‘Vivisector’는 무척 인상 깊게 본 공연이었다. 그들의 협력작업은 언뜻 모순이 될 듯한 공연의 두 매체- 몸과 영상, 가 움직임을 담은 영상이 평면이 아닌 입체적인 그리고 미세하게 움직이는 몸에 투영되어 제 3의 무대 위 영상을 만드는, 무용공연과 인스톨레이션의 묘한 경계에 있는 듯한 신선한 공연을 보여주었다. 공연 후 우연히 함께 하게 된 자리에서 안무가 크리스 하링에게 무용가로서 ‘스크린’화 하는 몸이 되는 작업에 어려움은 없었는가 질문을 하게 되었는데, 그는 흥미로운 대답을 했다. 그 이전 해의 공연에서 고무줄처럼 탄력있고 역동적인 그의 춤을 보았던 터라 그의 대답은 다소 놀라왔다. 그 즈음 그의 고민은 어떻게 하면 움직이지 않고 춤출 수 있는 가에 대해서 라고 하는.

‘모든 음악적 형식을 벗어난 음악이고, 모든 음향적 성분을 벗어나서 울리는 음향’
인 ‘소리 없는 음악’과, 마찬가지로 어떻게 움직일 것인가가 아닌 ‘움직임’이란 무엇인가, 무엇이 춤의 궁극적인 ‘내용’ 일 것인가에 대한 ‘움직임 없는 춤’ 이라는 예술가의 명제는, 어떤 한 예술의 가장 중요한 물리적 존재 근거를 ‘없다’고 가정하여 형식의 틀을 뚫고 들어가, 버리고 버렸을 때도 남는 것은 무엇인가에 대한 절박한 질문이고, ‘총체적’인 시각으로 개별을 보려는 시도라는 생각이 든다.

보이지 않는 건축

보르헤스(Jorge Luis Borges)의 단편 중 ‘두 왕과 두 미로’ (‘The two kings and the two labyrinths’)에 나오는 두 미로 중 첫 번째 미로는 바빌로니아 왕이 자신의 건축가들과 사제들을 시켜 공들여 설계한 ‘수많은 계단들, 문들과 벽들로 채워진 황동의 미로’로 바빌로니아 왕은 아랍의 왕을 이 미로에서 헤매게 하여 그를 조롱한다. 다른 하나의 미로는 아랍의 왕이 그 보복으로 바빌로니아 왕을 ‘가두어’ 결국 그를 죽게 만든 ‘오를 계단도, 밀어낼 문도, 헤매고 다닐 복도도, 길을 막아서는 벽도 없는 미로’, 곧 아무 지표도 없는 사막이었다. 소설 속 두 개의 미로는 마치 건축을 보는 상반되면서도 같은 두 가지의 의미를 함축하는 듯 하다. 그 것은 보이는 건축과 보이지 않는 건축이다. 바빌로니아 왕이 미로를 건축함에 있어서 동원했을 수 많은 아이디어와 그것을 현실화 해내는 재료들의 구축 등은 우리가 현재에도 ‘건축’할 때 부딪히는 과정 속에서의 과제들과 다르지 않을 것이다. 한편, 아랍의 왕이 ‘만든’ 혹은 ‘찾은’ 미로는 아무런 물리적 형식 ‘없이’ 완벽하게 ‘미로’라는 내용을 담는다.
건축의 힘은 만들어 가고 구축하는 것이 그 재료의 합이 아니라 보이는 많은 변수들을 조정하여 보이지 않는 관계- 몸과 주변의 공간, 사람과 사람, 사람과 자연, 를 변화시키고 이야기를 만들어 낸다는 점이다. 넘쳐나는 공간구성과 형태생성의 논리와 ‘양식’ 들 속에서, 때때로 소리 없는 음악과 움직임 없는 춤을 말한 예술가들의 ‘눈’으로 다 지우고도 ‘거기’에 남는 것은 무엇인가 응시해 볼 일이다.

지우는 건축

건축한다는 것이 그 결과물이 아니라, 과정이고 행위라면, 보이는 건축과 보이지 않는 건축이라는 결과물적인 분류가 아닌 ‘생성하는’ 건축과 ‘지워내는’ 건축은 도시와 건축을 보는 또 다른 시각이 될 수 있다. 만들어 내는 것만큼, 우리는 무엇인가를 지워내고 덜어내고 있으며, 창작과정에서도 인식하지 못하는 사이 건축가나 계획가는 생성하면서도 지워내는 끊임없는 긴장 사이를 오가며 작업하고 있지 않은가?
기억에 남은 우리 주변에서 사라져 간 장소들 그리고 그 방식을 떠올려 본다. 개인적인 기억 속에서 필자의 고등학교 시절 50여 년 된 교사를 폭파 철거하던 모습을 보면서 새 교사에 대한 기대와 묘한 슬픔이 교차하던 느낌은 그 이후로도 유사한 사회적 사건이 있을 때 마다 떠오르고는 한다. 남산 제 모습 찾기 정책의 일환으로 남산외인아파트가 폭파 철거되는 장면은 물론이고, ‘민족정기확립’을 위한 일련의 사업 중 하나로 논란 끝에 구 총독부건물이 철거될 때, ‘그 크기에 비하여 효용성이 떨어진다는 비판의 대안으로’ 여의도의 광활한 광장의 기억이 조성계획이 발표된 지 육 개월여 만에 여의도공원 착공과 함께 콘크리트 조각으로 사라질 때, 그리고 최근 청계천복원을 위해 한 구간 한 구간 사라지던 청계고가를 보았을 때까지 말이다. 물론 이 들 장소들은 새로운 의미로 채워지고 있고, 또 그럴 테지만 새로운 장소 또한 언젠가 어떤 추상적인 당위성 아래, 존재하지 않았던 것처럼 지워지지는 않을까? 지워지는 장소의 기억들, 축적된 시간의 가치들은 어디에 복원되는 것일까?
아름답게 사라진다는 것은 아름답게 지어지는 것만큼 중요하며, 의미 있게 사라진다는 것은 의미 있게 지어지는 것만큼 중요하다. 그것이 새로이 생겨날 것들의 가치로 ‘전승’되기 때문이다. 따라서 ‘좋은’ 것을 생성한다는 명제만큼 아름답게 ‘지워간다’라는 명제도 중요하다. 건축하는 행위는 멋진 청사진과 사업타당성이 보여주는 화려한 숫자들이 재현하는 ‘생겨나는 시점’에 그치는 것이 아니라 ‘변화’를 겪어내며 어긋나는 시간들의 켜를 보여주며 ‘아름다운 폐허’가 될 수 있는 시점까지 그저 남겨지는 것이 아니라 능동적으로 ‘지워가는 건축’으로 지속되어야 한다. 지워가는 건축 또한 생성하는 건축만큼의 상상력과 창의성을 필요로 한다. 보이는 건축과 보이지 않는 건축은 동전의 양면이고, 하나의 완성이 다른 하나의 완성과 다르지 않다. 생성하는 건축과 지우는 건축도 그러하다.